고도의 학습력으로 경쟁력을 갖추다
장군은 유학을 공부하다가 22세가 되어서야 장인의 권유로 무예를 선택하여 무관직에 진출했다. 글방에서 수학하는 동안 비범한 면모와 뛰어난 재능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통감⟫,⟪대학⟫ 등 어려운 책들을 샅샅이 읽었으며, 책을 읽을 때에는 대의에 집중했다. 나아가 전략적 연관성에 주목했다. 임진왜란과 왜, 왜의 작전과 전략상의 상관관계, 그에 맞선 조선수군의 대응책 등은 모두 이런 학습역량에서 나온 것이다.
장군의 전략을 유심히 살펴보면 병법에 통달했음을 알 수 있다. 사용한 용어를 보면, ⟪손자병법⟫,⟪오기병법⟫,⟪무경칠서(武經七書)⟫,⟪독송사(讀宋史)⟫등에 통달했고, 역사 인식도 대단히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젊어서도 무장으로서 진도(陳圖)를 자세히 그릴 정도로 병법에 능했다. 평소의 학습력으로 매 전투시마다 기대 수준을 끌어올렸고 거기서 체득한 현장 경험을 다음 전투에 적극 활용했다.
대표적인 예로 화포가 있다. 과거 수군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혁신해 낸 ‘이순신 전략’은 화포라는 화기를 중심으로 한 이현전(離舷戰)을 펼친 것이었다. 이현전이란 적의 배와 일정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화포 사용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잘 알다시피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크기가 크고, 견고하고 육중했다. 여기에 각종 화포를 설치하여 원거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하고, 근접전에서는 부딪쳐 적선을 깨뜨려 버리는 당파전법(撞破戰法)을 구사했다.
화포 장착형 전선(戰船)의 전통: 과거의 선례를 활용해 재혁신하라
과거의 선례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참고한 것은 조선수군사의 주요 산지식을 이룬다. 고려 말 왜구가 극성을 부릴 때 최무선은 역발상의 사고를 한다. 왜구를 육지에서 맞이하는 게 아니라 바다에서 적극 섬멸하는 공격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리하여 1383년 5월, 고려 장군 정지(鄭地)는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박두양(朴頭洋)에 나가 왜구 함대 120척을 맞아 유리한 바람을 이용하여 적을 궤멸시킴으로써 전세를 뒤집고, 바다싸움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관음포대첩에서 왜는 패배함으로써 사실상 퇴각하고 침구 행위는 수그러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때 정지는 세계해전사에서 처음으로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탑재한 함포(艦砲)사격작전으로 적을 물리쳤다. 고려 수군의 승리의 선례는 훗날 이순신 장군의 저 유명한 노량해전으로 이어진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수군 승전사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수군 전통을 십분 활용했다. 장군은 적의 핵심경쟁력인 조총의 사격 성능과 비거리를 반영해, 조총보다 먼 거리에서는 함포를 발사하는 전법을 활용했고, 근접전에서는 당파전법을 펼쳤다. 장군이 보여준 혁신은 다름 아닌 적의 전술 운용을 분석하고 대응한 점이다. 즉 왜군이 대규모 조총부대를 운용하는 전법인 ‘3단 제사전술(齊射戰術)’을 도입하여 조총의 약점인 느린 발사 프로세스를 보완하고 연속 사격을 가능하게 한 것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제사전술이라 함은 1선에서 조총을 발사할 때, 2선, 3선은 장약을 채워 넣고, 1선이 발사하고 나면 뒤 열이 차례로 발사하는 식이다.
반면, 이순신 장군은 함포 사격 시 화포와 회전이 빠른 판옥선 간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켜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리볼버 총처럼 배 자체를 360〬 회전시켜 가며 화포 사격을 가했다. 앞면의 포가 발사 중일 때에는 다른 면의 포들이 장약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시차 없이 100% 효율성을 올리는 함포 발사 프로세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 자체로는 적의 제사전술과 성격이 같다. 하지만 왜군의 제사 전술이 흔들리는 바다·전함·사수·조총이라는 4가지 불확실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판옥선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해상에서 배와 화포가 일치 되어 불확실 요소가 2개로 줄어들며 상대적으로 훨씬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장군은 화포의 사정 거리 내 적을 둠으로서 명중도를 높이고, 회전식 사격이라는 ‘무(無)시차 경영’으로 위협적인 함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서울대 박혜일 교수와 이유걸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의 실험에 따르면, 임란 시 사용한 화포는 천자총통이 1,512m, 지자총통이 2,520m, 현자총통이 2.520m, 황자총통이 1,386m의 사정거리에 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실험 결과, 유효사거리를 70m로 유지하면 매우 높은 명중률을 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수학 공식처럼 총포전의 경우, 적과 아군의 거리는 조총의 유효 사거리보다 크고, 화포 사정거리보다는 작은 지점에서 적함을 맞이해 전투를 치뤘다. 이런 방식으로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시키고 적을 궤멸로 몰아넣은 대단히 치밀한 전투 수행 방식을 취했다. 화포를 탑재한 ‘이순신 귀선’은 화포시대의 전술을 훨씬 앞당긴 것이었다. 고려 장군 정지가 관음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215년이 지난 다음,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며 적을 완전 제압했다.
반면, 일본 수군은 배를 바짝 갖다 붙이고 싸우는 접현전(接舷戰) 방식을 취했다. 이는 조총과 칼을 쓰는 무기 체제와 관련이 크다. 장군은 적선의 근접전을 막으며 적의 주요 경쟁력인 조총을 무력화 시킬 방법을 찾았다. 여기서 조총보다 장거리 발사 능력을 갖춘 화포를 주력으로 삼는 전략이 나온다. 당시 일본 수군은 전국시대를 거쳐 사무라이로 실전 훈련을 쌓아온 막강 백병전 부대였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적이 조총으로까지 무장했으니 실전에서의 위력은 더 가공할 만 했다. 유성룡은⟪징비록(懲毖錄)⟫에서 적의 전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왜병이 먼저 다리 아래 숨었다가 조선의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머리를 베어갔다. 우리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기가 꺾여 버렸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썼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경영자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해 어떤 준비경영을 하고 있을까?
당시 조총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공포감을 불러온 무기였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민간에서는 한 방의 탄환이 관통해 서너 명이 쓰러지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돌며 두려움이 확산됐다. 장군은 이를 극복하고자 ⟪봉진화포장(封進火砲狀)⟫에서 조총의 제작, 보급을 주청한다. 그러면서 적의 경쟁우위 병기인 조총을 만들어 다섯 자루를 조정에 올려 보냈다. 장군은 “총통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라, 연구 끝에 조총을 만들어 시험발사를 하고 같은 모양으로 만들도록 견본을 보내고, 공문으로 알게 하기까지”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장군의 공학도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총통화기 및 화약의 연구개발 중에 장군은 조총의 성능이 탁월한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총신이 길기 때문에 총 구멍이 깊다. 그리하여 쏘는 힘이 맹렬하고, 맞기만 하면 부서지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공학적으로 대단히 타당하고 중요한 분석이다. 장군은 과학적 원리를 통해 조총 성능을 규명하였다. 이런 개인소지 무기개발은 각종 총통 및 거북선 발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대단히 감성적이며,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요즘말로 좌우뇌가 통합된 통섭형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군은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재능 있는 부하들로 하여금 만들게 했다. 또한 경쟁력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지식을 하나로 끌어 모으고, 지방과 고을에서도 쓸 수 있게 지식을 공유했다. 학습효과를 대폭 확장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창조적 혁신역량이 여기에 있다. 과거 사례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전략을 풍부히 생산해 내고, 이를 전쟁이 벌어지는 경영현장에 접목시켰다. 이처럼 화포의 등장으로 이현전은 근현대 함포 작전의 핵심을 이룬다.
글로벌 초경쟁 환경 하에서 국제 경쟁력은 확고한 경쟁우위를 통해 막힌 시장을 뚫고 들어갈 때 비로소 활로를 열어젖힐 수 있다. 여기에는 돋보기와 같이 빛을 모아 불을 지피는 초점전략이 필요하다. 자원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고도의 학습력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점을 장군의 혁신활동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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