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통섭형 지식과 전략 캠퍼스
휴가를 자청해 집필 관련으로 남해 한려수도 일대를 돌아보았다. 남해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이토록 많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군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도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줄로만 알며 살았다니! 400여 년 전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그를 만나며 남다른 생 각을 다시 하게 된다.
23전 23승의 무결점 완벽한 승리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승리의 원천을 만들어 낸 ‘이순신적’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장군 관련 자료를 다시 훑으며 이순신적 힘이 인문과 타학문 분야가 결합된 ‘통섭적 발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가 익히 아는 거북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함께 핵심 전함인데 배의 건조 방법부터가 특이하다. 거북선은 간소화 선형 방식의 설계를 따름으로써 건조시간, 비용, 노력 등 여러 면에서 경쟁우위를 가졌다. 간소화 선형이란 핵심에 집중한 단순화 전략을 취한 걸 말한다. 용골을 중심으로 U자형으로 배를 제작하는 것과 달리 평평하게 건조해 원가를 1/4 이상 절감했다. 전시 자원 활용책이다.
또 판옥선에 용머리와 철갑을 씌우게 했는데 그 즉시 거북선으로 변신한다. 이런 트랜스포밍은 유연한 제작 방식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고, 판옥선에 쓰인 공용재(일테면 공옹부품)를 거북선이 80퍼센트나 쓴 까닭에 대한 설명이 된다. 이 모두 급박한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변신력은 전투에서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은 전투가 벌어지는 지형에 맞는 배의 구조였다. 남해안의 낮은 연안 수심을 고려해 회전력과 기동성을 높인 것은 평평한 배의 구조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거북선의 밑바닥이 평평한 것은 판옥선의 구조를 본받은 것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우리 해안의 특성이 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낮은 선복은 얕은 바닷가에서 큰 적 함대와 대적하는 데 훨씬 유리하게 작용했다. 얕은 해안가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은 조선수군의 작전선(作戰線)과 밀접히 관련 있다. 바다가 시차를 두고 갯벌로도 변하는 전투 해안의 조건을 고려해 만든 것이다.
이 점에서 가장 완벽한 전투선이자, 적함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목적성 전함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군은 거북선 건조 시 자라와 거북을 방안에 두고 3개월 동안 관찰한 것으로 알려진다. 자라나 거북의 배 밑이 평평한 것과 두 전함의 밑이 같은 구조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또 선체가 커서 화포나 총통 등 육중한 무기를 싣고 다니는 데 크게 유리했다. 여기에는 ‘생물학’적 지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오랫동안 집적된 선박 지식의 모든 특장점을 반영하고 있다.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창선을 꽂고, 화약무기, 철갑판, 선수방패 등을 탑재함으로써 압도적 경쟁우위를 살렸다. 오랜 시간 누적된 조선 선박 지식의 집합체이자, 지식통섭의 결과다. 이처럼 거북선은 당대까지 내려온 조선의 모든 전함 기술을 혁신해낸 최고의 전함이었다. 이 점은 장군이 ‘조선학’ 분야에 매우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또 장군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정확히 관찰해 배의 구조를 설계했고, 또 전투 시 전략적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해 적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적을 몰아넣을 ‘요로(要路)’와 ‘요구(要口)’전략을 편 것은 핵심이 되는 길과 입구를 틀어막아 적을 멸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장군의 ‘조력학’적 지식 및 ‘지리학’ , ‘해양학’적 지식수준을 잘 드러내준다. 이 같은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한일 간 지식과 과학의 한판 승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거북선은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된 일종의 돌격선이다. 조선수군의 주력 군선인 판옥선을 혁신시킨 것이다. 적병이 배에 오르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날카로운 쇠못을 박아 보호막을 만들어 적의 화공과 활, 조총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설계됐다. 함미의 키 부분을 거의 수직으로 설계한 것도 적이 뛰어들지 못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적의 전법을 면밀히 꿰뚫고 만든 전략 함선이다. 꼬리부분이 이렇게 치켜 올라간 것은 유속 저항을 고려한 공학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배의 무게중심을 잡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적함의 전투 대열을 뚫고 들어가는 당파(撞破)능력은 건조 시 견고한 소나무 사용과 이음새에 있다. 이음새로는 박달나무나 전나무가 쓰여 물에 불을수록 외판을 더욱 견고하게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거북선의 임무가 당파 목적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위주로 한 주력군이 전열을 흐트러뜨리면, 그 사이 적의 지휘부까지 신속히 돌격해 일거에 적장을 격살하는 참수공격을 위한 특수 군선 임무도 수행해 냈다. 지붕을 쇠로 덮어씌운 것은 적이 뛰어들게 하지 못하려는 목적과 함께, 적의 지휘관을 저격할 때 적군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상 목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작전 시 거북선이 돌격해서 적의 전열을 깨뜨리면 이어 판옥선이 집중공격을 가했다. 이 같은 주력함선 투톱(two top) 전략으로 장군은 숫자상 중과부적인 왜군을 맞아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냈다.
거북선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내부구조다. 여기에도 숨은 혁신에의 노력이 십분 반영되어 있다. 배를 젓는 층과 전투를 하는 층을 분리시킴으로써 각각의 병사들은 어떤 방해도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순신 귀선(龜船)’은 1592년에는 3척, 1595에는 5척에 이르는데, 원균을 통제사로 한 조선 함대가 정유재란(1597년)때 칠천량에서 모두 궤멸될 때(7월 15일) 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통제사에 재임명된 장군은 겨우 12, 13척의 패잔 전선을 거두어 명량해전에서 대승리를 한 후, 이듬해(1598년) 노량해전에 나섰다. 그 1년 2개월 동안 거북선을 다시 건조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의 맹활약으로 발목을 잡힌 일본은 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전선(戰船)인 안택선을 혁신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안택선은 쇠못을 이음새로 쓴 탓에 녹이 슬기도 하고 배의 목재까지 부식시켰다. 또 조선 선박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견고하지 않아 거북 전함에 쉽게 당파되었다. 연안 해전을 염두에 두고 배를 건조하였더라면 혁신을 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왜의 함선은 군사를 육지로 이동시키는 수단에 국한되었다. 용골을 U자형으로 만든 목적은 수송의 편리함과 안정성 그리고 병사들의 배멀미를 줄이려는 목적에서였다.
여기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육전에서의 성공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 육전에서 승리를 거둔 그에게 해전은 별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 내부를 어떻게 해서든 안정화시키고자 군부의 힘을 조선에 집중시키고, 남아도는 병사들을 조선 땅에 쏟아 부으면 그만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존에 설정해 둔 함대 전략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왜가 전선과 화포 혁신을 이끌어 냈다면 바다에서의 전투는 물론이거니와 전쟁 국면 자체도 달라졌을 것이다.
거북선을 만든 선소의 위치도 절묘하다. 임진왜란 당시 장군의 지휘 하에 건조된 세 척의 거북선은 여수 일대 각기 다른 선소에서 제작되었다. 전라좌수영 본영 앞의 선소, 돌산 방답진의 선소, 쌍봉 선소가 그 세 곳이다. 장군이 이렇게 각기 다른 선소에서 거북선을 제작케 한데 무슨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목재 등 자원 채취의 용이성, 동시다발적으로 거북선을 제작해야 할 급박성과 필요성, 진수 후 작전 투입의 적지성(適地性), 건조 지역의 제 조건, 프로젝트 관리상의 백업 기능 차원 등 여러 이유가 반영되어 있다. 일종에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인을 줄이고, 효과성을 높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프로젝트 관리상 백업 차원에서 거북선 제작의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할 수 있는 세 중추적 요충지에 선소를 마련했다. 이는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소를 줄이고,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각기 다른 세 곳은 거북선 건조 후 작전 투입에 가장 적지(適地)로 인식되는 곳으로 각 선소들의 위치는 정확히 남해 바다를 향해 뻗은 ‘진격형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다. 거북선 제작 ‘골든 트라이앵글’ 개념은 백업 장치였던 것이다. 참고: 전경일, 《이순신 경제 전쟁에 승리하라》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트라이앵글’로 부를 수 있는 각 선소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본영 선소는 남해를 통한 경상도 해역 출격 거점으로, 방답진은 고흥반도와 순천만 일대를 포함한 전라 인근 해역 출격 거점으로, 쌍봉 선소는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두 선소를 지원하는 백업어(back upper)로써 기능했다.
한편 전라좌수군의 본영인 진남관은 위치상 본영은 시제품 개발 센터로 테스트 베드(test bed)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해상전투용 거북선 건조의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방답진은 해상 최전방에 위치시킨 포스트 선소로 작동했으며, 쌍봉 선소는 가장 안쪽에 깊이에 위치시켜 제3 R&D 센터의 임무를 수행했다. 각 선소간 거리는 쌍봉-본영(7킬로미터), 본영-방답진(15킬로미터), 방답진-본영(17킬로미터)으로 이순신 거북선 R&D 센터는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진격형 골든 트라이앵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분석해 보면, 장군은 ‘지형학’, ‘설비입지학’, ‘시설 운영학’ 등을 두루 고려해 거북선 제조의 대역사를 맡을 선소 입지를 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여수 선소마을은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든 곳인데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쌍봉 선소 굴강(屈江)에서 거북선을 만들고 대피시켰다. 굴강은 천연 해안 요새에 구축한 인공호로 썰물 때에는 물이 빠졌다가 밀물 때는 물이 차오른다.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물이 차오를 때를 기다렸다가 진수식을 거행하며 적을 무찌르기 위해 굴강을 박차고 저 먼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결점의 승리를 가져 온 이순신 전략의 핵심은 다름 아닌 수학적 원리에 있다. 그것은 해상에서〈피타고라스 정리〉를 철저히 활용한 것이었다.
그림에서 성벽 위 A지점의 적을 향해 B지점에서 화살을 쏴서 적을 맞히기 위해서는 B와 C 지점간 거리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계산에 쓰인 원리가 바로 피타고라스 정리이다. 이 정리는 이순신 장군의 수전에 적극 활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함포를 B, 왜군의 조총을 C, 해상에서의 아군과 적군의 거리를 a라 할 때, 장군은 B에서 방포하는 화포의 사거리가 C지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 거리를 계산해 포탄 도달거리를 계산해서 적용했다. 장군은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C를 적이 위치 지어져야 할 지점으로 설정하고 화포 유효사거리인 70미터에서 유효명중률 거리인 140미터 내에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유인책을 썼다. 승리의 원천에는 철저한 수학적 원리가 계산되어 있다.
임란 시 사용한 화포를 살펴보면, 방포 사정거리가 천자총통은 1512미터, 지자총통은 2520미터, 현자총통은 2520미터, 황자총통은 1386미터에 미치고 있다. 실험 결과, 유효사거리를 70미터로 유지하면 매우 높은 명중률을 보였다. 또 유효 명중률 거리가 140미터이다. 반면 조총의 기본사거리는 100~200미터, 조총 유효사거리는 30~50미터이다. 양측 모두 가장 최상의 명중률을 보이는 사정거리를 기준으로 보자면, 이순신 함대(B)는 적(C)을 궤멸코자 화포사거리(c)를 계산해 아군은 조총의 유효사거리(50미터)밖에 있게 하고, 적은 화포 유효사거리(70미터)내에 포지셔닝 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따라서 적은 언제나 전투 시 아군에 의해 그 차이 지점인 20미터 내에 위치 지어져야 한다. 이것을 화포 유효명중률 거리인 140미터와 조총 기본사거리 100미터로 환산해 보면, 40미터 이내가 적이 포지셔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위치인 것이다. 한산도에 설치한 활터와 과녁과의 거리가 145미터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화포의 유효 명중거리를 반영해 해상에서 거리 감각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 같은 거리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활터와 과녁의 거리인 145미터와 화포의 유효 명중률 거리 140미터 간 차이인 5미터는 무엇을 뜻할까? 해상에서 이 차이가 크진 않을 수 있지만, 이는 실제로 적을 사거리 내 두려는 착안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골프에서 ‘홀컵을 지나는 공만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어 있다(‘never up, never in’의 법칙)는 법칙처럼 말이다.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위력 면에서도 적선 앞에 떨어지는 포탄보다 적선 위를 바로 지나가 폭발하는 포탄이 심리적 압박감을 더 심어 줄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장군은 적의 핵심경쟁력인 조총의 비거리를 반영해, 가급적 적선을 아군의 화포 반경 내 두는 전략을 펼쳤다. 이것이 해전에서 아군 피해가 절대적으로 적었던 이유이고, 거의 1대 10의 규모로 벌어지는 화포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이유이다.
나아가 청동 화포를 장착한 거북선이 적에게 완패를 안겨 줄 수 있었던 것은 ‘무(無)시차 360도 경영’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적의 조종 사격 방식이 1선에서 발사할 때 2선, 3선은 장약을 채워 넣는 제사방식을 취했다면, 조선 수군은 이를 보다 정교하게 적용해 함포 발사 시 배를 리볼버 소총처럼 360〬 회전시켜 가며 화포 사격을 가했다. 시차 없이 100퍼센트 효율성을 살리는 함포발사 프로세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아가 왜군의 발사법이 흔들리는 바다․전함․사수․조총이라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네 개나 작용하고 있음에 반해, 거북선과 판옥선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해상에서 배와 화포가 일치되어 불확실성의 요소를 두 개로 줄이며(50퍼센트로 불확실성이 줄어드는 것은 확실성 면에서는 100퍼센트나 늘어난 것을 뜻한다.) 상대적으로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처럼 화포사격시 ‘무시차 경영’은 이순신 장군의 지식 경영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이자, 승리의 또 다른 원천인 것이다.
장군이 행한 여러 창조적 전략들을 살펴보면, 임란 승리의 배경은 막하 병졸들과 필사즉생의 각오로 전투에 임한 것은 물론, 승리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공학적 지식을 활용한 데 있다. 400년 전 왜적을 맞아 싸운 이순신 해전 승리의 원천은 지식 통섭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임진왜란은 지식 전쟁의 승리였다. 이 지식 전쟁은 오늘날 더욱 치열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장군을 여러 면에서 다시 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