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것은 ‘확실’과 ‘불확실’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확실하냐고 묻는 사람은 이미 반쯤 운명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다
현시대 사업의 기회의 창(窓)은 너무나 짧게 열렸다, 닫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의 창은 수없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기를 반복한다. 창 밖으로 바뀌는 세상을 보고 뛰쳐 나가 누가 먼저 잡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지금 하는 사업이 불확실성과 대면하지 않을 수는 없다. 기업은 불확실성과 영원한 투쟁을 멈출 수는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사실을 외면할 생각도, 부정할 생각도 마라. 그것은 객관적 상황(내지 진실)과 동떨어진 자신의 주관적 바램일 뿐이다.
아무리 성공한 기업이라고 할지라도(盛者) 반드시 언젠가는 셔터가 내려지는 날을 맞이 하게 된다(必衰). 그렇기 때문에 기업 경영은 공식이 불분명한 방정식을 푸는 문제이며, 인간 심리에 적응하고 인간을 움직여 나가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언제나 내재되어 있는 퍼즐 게임을 푸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속(永續)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너무 겁 주고 있는가? 아니면 맥이 빠지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업을 'GOING CONCER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인위적인 문제들은 자본과 수완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을 딛고 어떻게 자신과 기업을 바로 놓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어떻게 경제적 의의와 전망성을 갖고 사업을 추진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존과 번영의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선 뚝심과 준비된 자기 자신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사실 그렇지 않은가?)
뚝심은 사업을 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다. 계속은 힘이기 때문이다. 또한 준비된 자신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추진력의 원천이 된다. 잘 훈련된 자기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를 만드는 것(self building)’은 사업가(직장인)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누구도 완벽한 생존지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삶은 살아가면서 인생과 사업의 항로를 면면히 적고 고쳐 나가는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자기 확신과 신뢰는 일을 집중해서 밀고 나갈 때 큰 버팀목이 된다. 또 그것은 몰두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결심과 행동을 무디지 않도록 해 준다. 뛰어 넘어라. 크게 성장한 기업들은 언제나 경쟁사를 따라 잡거나, 이들과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내면의 ‘가치혁신(value innovation)’이라 불리는 전략을 채택해 경쟁사들을 아예 경쟁 대상에서 제외시키는데 역점을 두어 왔다. 다시 말해, 경계를 뛰어 넘은 것이다. 판을 달리 짠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옆 사람과 비교할 만큼 그리 한가한가? 그렇지 않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기본기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대가 불확실함으로, 역설적으로 돌이켜 보면, 축복이다. 만일 세상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전임자가 한 일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변화하는 세상에 감사하라. 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엉겅퀴만으로 연명하는 지금의 신세를... 이것이 이 세상이 당신을 환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보편적인 이야기이겠지만, 성공을 위한 실험은 결코 아무것도 거치지 않고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험자의 경험도 자기 것으로 살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험도 신속하게 재구성해 기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닷물이 불기 전에 배를 건조(建造)시켜야 무엇인가를 태울 수 있는 셈이다. 기회는 늘 불확실성에서 만들어진다. 앞으로 5~10년 후에 어떤 산업 부문이 경쟁력을 갖게 될지 현재로선 아무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는 예측하고 실행한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생각이라도 꼭 같은 생각으로 시도하는 사람이 지구상에는 1,500명이 있다.
변화가 없다면, 모든 것이 확실했다면, 어디에서도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게임은 불안한 가운데 계속 이어지고, 기록은 경신된다. 삶과 사업은 이제나, 저제나, 앞으로나, 그 ‘확실성’에 도달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적어도 나의 게임은 끝난다는 것이다. <주만치>가 생각나는가?
파산 기업의 자산을 평가해 인수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하는 링크 브룩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모두는 확실한 것을 원하지. 하지만 확신의 뒷모습은 바로 거짓말이오. 바보들이 쓰는 말이지. 아무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확실한 건 한가지 뿐이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내 인생의 고삐를 아직은 쥐고 있다는 것! 그게 나의 미래란 말이오.
이렇듯 변화무쌍하고 확실성이 없어 보이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과 기업이 처한 현실은 암담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과거 몇 억 년 전 보다 훨씬 안전하다. 우리 조상들 중 어떤 부류들은 빙하기를 겪어야 했으며, 화산재에 뒤덮인 암울하고 생존에의 미래가 없어 보이는 하늘 아래에서 살아 남아야 했고, 전쟁 속에서 고아가 되기도 했다. 사람이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보면 숫하게 나온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렇지는 않지 않은가?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불확실성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을 우화식으로 표현해 보았다.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라.
항해기(선원편)
매우
불길한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매번 이동하던 항로는 최근 들어 파고가 수시로 바뀌어 불안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파도가 더욱 높아 질 거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항해를 해야 했다. 더구나 고래 떼의 이동이 시작되어 항해에 지장을 줄지 모르므로 우리는 조급해지기 조차 했다. 한동안 아무 변화도 없더니 갑자기 흐릿한 안개 너머에서 고래 떼가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과 우리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십자형으로 만나게 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서둘러 그 지점을 통과해야 했다. 갑자기 그들이 앞을 가로 질렀다. 순간, 배의 선두가 앞서가는 고래에 부딪치며 몹시 흔들거렸다. 검붉은 피를 흘리며 숫고래가 몸을 뒤 채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고래의 피냄새를 맡고 저 멀리서 상어 떼가 몰려 드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작살로 놈들을 꿰려고 했으나, 그것은 무모한 짓에 불과했다. 우리는 키를 돌려 항로를 변경했다. 그날 이후로 불운이 계속되었고, 누구도 항해하는 동안 더 이상 고래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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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기(고래편)
우리는
항해 중이었다. 바닷물이 뜨거워졌으므로 우리는 좀 더 차갑고 크롤 새우가 많은 해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식구들도 많이 불었고 투항해 온 소규모 집단들도 잘 융화되어 주었으므로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좀 더 먹을 것이 풍부한 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불어나는 식구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항로에 대해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 식솔을 이끌고 통치력을 발휘한 원로들의 의견대로 우리는 예전에 이동했었던 항로를 따라 항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젊은 친구들은 먼 바다까지 나가 보았다는 새로운 경험을 내세우며 반대를 했다. 선박의 이동 항로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의사결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힘들더라도 우회하는 길고 험난한 코스를 선택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 방식은 여태까지 우리가 해 온 것 방식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경험이 적은 친구들이 무얼 아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처음 며칠간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도중에 선박이 보이거나 상어 떼의 서식지를 지나갈 때 마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헤엄을 쳤다. 문제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점차 우리의 항로가 배의 이동 항로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항해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원로들에게 이를 말하지 않았다. 무리에서 이탈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선발대로 간 수장이 뱃머리에 부딪쳐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용감했던 자였다. 하지만 그가 흘린 피가 이미 흥건히 바닷물에 번져 오고 있었다. 행렬은 심하게 동요했고, 몇몇 무리는 광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이탈을 했다. 우리는 항로를 잘못 잡은 원로들을 비난할 겨를도 없이 상어 떼를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야 했다. 동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냄새를 맡고 상어 떼가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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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기(상어편)
바닷속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그저 유영을 할 뿐이었다. 저 멀리 거대한 선박이 지나가는 듯 희미하게 햇빛을 가리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선박과 고래 떼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육중한 선박이 지나갈 때까지 그들이 멈추어 서서 기다리거나 아니면 재빨리 가로질러 사라지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기회’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듯 태연하게 지나갔다. 선박은 전속력을 다해 나아갔고, 마침내 앞장 섰던 숫고래가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날카로운 배의 선두에 부딪쳤다. 허여멀건 뇌수가 핏덩이와 함께 물속에 번졌다. 하늘에서 이 광경을 먼저 알아 본 것은 갈매기였다. 그들이 내리 꽂히듯 피를 쏟아내는 고래위로 내려 앉았다. 잠시 배는 멈추어 섰으나 이내 수정된 항로를 따라 멀리 사라져 갔다. 동료들이 수없이 바다 밑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죽어가는 고래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다. 우리는 좌우 상하에서 고래의 부드러운 살점을 향해 달려들어 크림 속을 지나가듯 관통했다. 잠시 후 침몰하는 선박처럼 죽은 고래의 뼈가 해저로 가라앉기 시작하자 저 아래에서 가오리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뱃속을 가득 채운 우리는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상어인 우리에게 한가지 진실이 있다면, 우리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다만 바닷물에 씻겨 나가 아무도 보지 못할 뿐이다. 이 바다에 그걸 아는 생물은 전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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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된 것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선택, 우연과 필연의 조합, 운명에 대한 반응 등등,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제반 조건들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게 되었을 것이다. 불길한 날씨, 파고의 변동, 일기예보, 조급함을 부여하는 환경적 요인, 갑작스런 출현, 항로의 변경, 이동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 원로들, 새로운 경험의 묵살, 위험한 의사결정, 우회, 길고 험난한 코스, 선택의 문제, 의견의 무시, 방식의 차이, 이탈과 죽음에 대한 공포, 위험한 상황에 대한 직감, 메신저로써의 갈매기, 진실, 눈물 등등.
세상은 이렇게, 불확정 되어 있기에 오묘하다.
현실이 불확실함으로 조금이나마 확실성에 근접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방책을 세우는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에 불여튼튼의 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험을 버린다면, 불확실성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고, 확실하고 안전한 게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실, 갑각류와 절지 동물들은 키틴질의 갑옷으로 싸여 있어서 안전해 보일지 모르나, 그 보호막 때문에 다른 동물들로부터 고립되어 외부 세계와 교류가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깃털도, 두꺼운 외피도, 사나운 발톱과 이빨도 전혀 없던 인간이 도구와 머리를 써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빈약한 보호 수단 때문이었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언제고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인식, 즉 두려움은 지혜의 출발점이다. 지금은 그 지혜를 이용해 기회의 요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계속 달려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고, 경쟁하는 이 바다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항해를 해야만 한다. 항해를 멈추는 순간, 바다에 떠도는 어떤 것들도, 언젠가는 가라앉게 되어 있다.
이 불확실한 시간에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이 늘 문제인 것이다.
ⓒ전경일, <진정한 성공을 위한 자기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