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신생 조선의 CEO가 된 다음에 조선에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변화’였다. 과거의 형식뿐인 ‘위민(爲民)’ - 세계 어느 역사를 봐도, ‘국민을 위해!’라는 것은 정말 오래된 슬로건이 아닌가! - 은 이제 실질적 모습으로, 실생활 속에 구현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세종 정부의 미션이었다.
세종이 추구한 ‘변화’란 백성들에게 새로운 생활 패턴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했고, 한편 가장 중요하게 ‘삶의 질’을 개선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세종이 이렇듯 삶의 환경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생생지락(生生之樂)’의 세상은 고사하고, 백성들로부터 이전 왕조인 고려에 대한 ‘향수’마저 털어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세종으로서는 진정 ‘민주(民主) 경영’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각별히 요구되는 절대 절명의 경영 목표인 셈이었다.
물론, 이 시대는 군주에 의한 국가 경영이었기 때문에 근대 이후 ‘민주(民主)’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유교적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라는 대민관(對民觀)은 실로 민주(民主)적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이러한 대민관(對民觀)은 세종시대에 이르러 더욱 중요한 국가 경영 이념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세종에게는 백성을 위해 먹고, 입고, 자는, 소위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자신이 취임한지 5년째 되는 해에, 또 26년째 되는 해에도 이러한 경영목표가 완전히 달성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한 어조로 이의 달성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서 영원히 탄식하는 소리를 끊고 각각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할 것이니, 오로지 너희 이조(吏曺)는 이러한 지극한 마음을 살펴 내외에 효유하라.”(『세종실록』5년 7월 신미)
“국가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농사란 의식(衣食)의 원천으로 왕정(王政)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오로지 인민의 대명(大命)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에 복무케 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 그 근본에 종사하여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리오.”(『세종실록』 26년 윤7월 임인)
[삶의 질을 개선하라]
세종의 국가 경영목표의 핵심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 이상 분명한 경영 목표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목표 실천을 위해 각종 제도의 정비와 생산성 확대는 필수적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해 과학과 IT기술의 도입은 반드시 필요했다.
이와 같은 미션 완수를 위해 세종은 새로운 농법의 도입 과정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당시의 국가경영 행태로 보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고, 이전의 구태를 확연하게 뛰어넘는 매우 혁신적인 조치였다.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의견을 묻고, 백성들과 대화하는 ‘현장경영,’ ‘풀뿌리 경영’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이처럼 ‘시대의 한계를 뛰어 넘었던’ 경영자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 경영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변혁 시대의 주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개량농법을 시행하기에 앞서, 민의(民意)를 알기 위해 여론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보고된 총인원만도 17만 1천명에 달했다. (『세종실록』12년 8월 무인일의 기록에는, 찬성이 98,657명, 반대가 73,949명, 총 171,585명이라고 밝혀져 있다.) 이러한 CEO의 혼신의 노력이 쌓여 신생 조선은 결국 국가 체제가 시스템화 되는 경영의 진면목을 갖출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가 경영 실적은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실적을 챙겨라]
세종은 실적을 가장 중시했다. 실적 없는 경영은 실제 조선을 반석위로 올려놓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의 경우에는「훈민정음」창제를 비롯한 문화적 업적이 워낙 탁월해 오히려 국가경영 실적은 간과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국가 CEO로서 세종이 한 일은 대부분 ‘국가 경영’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은 철저하게 실적에 기반한 것이었다.
세종은 CEO 였지만, 한편으로 뛰어난 실무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실제 현실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직접 추진해 나가는 모습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실적 중심의 실용주의 노선은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농정책에서 잘 드러나며, 한편으로 국토를 지키고, 넓히려는 부국강병의 정책에서 오히려 강하게 드러난다.
[‘기쁨의 경영’으로 발전시켜라]
그의 경영이 만백성의 ‘기쁨의 경영’으로 귀결되고, 자신의 시대를 태평성대와 해동의 요순시대로 불리겠금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종의 탁월한 경영 실적이 있었다. 백성들의 배가 부를 때라야 그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극히 단순한 원리를 세종은 알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 국가나 기업 경영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종이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역대 국가 CEO들이 백성들로부터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최고의 찬사와 존경의 염을 받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경영 실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풍평(豊平)’과 ‘희호지락(熙皞之樂)’의 세상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그의 경영철학은 지향하는 바가 드높았고, 깊이가 달랐다. 또한 그것은 결코 ‘현실’에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농사직설』의 보급을 들 수 있다.『농사직설』은 그 당시 농업 혁명의 대표적인 기술서였다. 『농사직설』이 보급되면서 곡물 재배 기술은 크게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식량이 풍부해 졌다. 또 모든 백성들은 솜을 넣은 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목면 재배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더구나 목면 생산량이 급증해서 그 무렵부터 조선은 목면을 일본에 계속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는 실로 한국인의 의(衣)생활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였다. 이처럼 솜을 넣은 옷으로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이전에는 쉽게 믿어지지 않을 의복 문화의 일대 혁명이었다.
[리더는 서포터(supporter)다]
한 나라의 리더로써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조직의 비전을 설정하고, 과업이 수행되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이는 어느 시대의 리더에게나 필수적인 요건이다. 예를 들어 과학 기구를 발명하라고 지시하거나, 한글 창제의 아이디어를 내 보라고 지시해 놓고,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임무를 부여하면서도 그 방법까지 알려준 실천형 리더였다. 이처럼 실천적 CEO였기 때문에 세종은 과학기술 분야의 영재인 장영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낼 수 있었고, 신숙주 등에게 13차례나 해외 출장을 다녀 올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CEO의 이러한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각각의 프로젝트들은 힘을 받을 수 있었고, 팀원들의 역량이 확고하게 모아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도 성공한 CEO로 ‘영예의 CEO전당’의 제1자리에 가서 앉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영에 있어 무엇보다도 그의 성공적인 경영 핵심이 결국 많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그것은 예컨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 신생 조선이 처한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 신생 조선의 앞날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신하들로부터 동기가 발생하도록 했다.
* 실행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조직구조와 평가 시스템 및 보상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밀고 나갔다.
* 전략과 방향, 변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 말뿐이 아닌, CEO가 행동으로써 모든 분야에서 직접 솔선수범을 보여 주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