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 여가활동으로 사기 진작과 반성의 시간을 갖다
전시 상황이라고 해서 24시간 긴장만 하고 살수는 없다. 그럴 땐 오히려 집중도가 떨어진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강약을 조절해 낼 때 비상 사태 시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장군은 군사들이 전시와 다름없이 활쏘기 훈련을 거듭하도록 했다. 상시훈련체제를 가동했지만, 때로 훈련에 참여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회식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
(활쏘기를 해서) 요전 번 진 군관들 편에서 한턱을 내어 모두 술이 몹시 취해 가지고 헤어졌다. (1596년 2월 16일)
이런 기록은 군중 생활의 짧고 달콤한 망중한을 엿보게 한다. 또 체찰사 이원익이 한산도를 방문했을 때, 체찰사가 베풀어주는 형식으로 5,480명의 군사를 먹이기도 했는데, 이런 회식에 대해 장군은 “내 스스로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자는 생각”에서 베푼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군사들의 사기는 전쟁의 승패를 가눈다. 장군은 전란 중 핍진한 마음과 심신을 리프레쉬하기 위해 영리(營吏)를 불러 경합쟁취형 실내 오락인 종정도(從政圖)라는 주사위 놀이를 하도록 했고, 장군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군사들에게 긴장된 상태만이 아니라, 적절한 오락시간도 함께 주었던 것이다. 요즘말로 ‘일하기 좋은 기업(Great Work Place)’의 일면이다.
종정이란 공자의 말처럼 정사에 종사하는 요령을 뜻하는 말로 ‘나라의 정사를 법에 따라 다스린다’는 의미가 있다. 마음을 가다듬어 학문의 길에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하고, 그 뜻으로 말미암아 나가는 순서가 조리 있고 문란하지 않아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깨우침을 주는 게임이다. 성현(成俔)이 쓴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게임의 법칙이 잘 나타나 있다. 주사위의 여섯 면에 ‘덕·재·근·감·연·빈(德才勤堪軟賓)’을 써서 ‘덕·재’면 올라가고[升], ‘연·빈’이면 파직되어[罷] 벼슬살이를 하는 것[陞卿]과 같다. 이 벼슬놀이에는 반드시 강등되고, 파직, 구금되는 등 순탄치 않은 승진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속내는 벼슬살이를 하는 어려움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깨닫게 해주는 교훈적 의미가 들어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사위는 없지만, 임진왜란 7년간인 2,539일 동안 장군은 바둑 8회, 장기 9회와 더불어 종정도를 5회하는 등 총 22회의 여가 오락을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1593년 3월 4일 당항포 해전이 끝나고 9월 29일 장문포 해전 사이에 집중적으로 바둑 5회, 장기 2회를 실시하였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594년에는 바둑, 장기 각각 3회, 3회, 1595년엔 장기만 4회 실시했다. 종정은 1594년엔 3회, 1596년에는 2회를 실시했다. 기록을 보면, 종정도 놀이를 한 5일 중 4일간 비가 온 것이다. 비오는 날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으므로 심심풀이로 게임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군관이 두는 장기를 구경하기도 했고, 장군이 직접 바둑을 두기도 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놀이방법에 “내기(爭)를 하였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참가자들이 승부욕을 갖고 더 흥미롭게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험난한 경영에 대한 교훈도 얻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얻는 이중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경쟁과 협력의 원리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노래가사는 즉흥적으로 말을 지어 읊기도 했다. 훗날 윷을 던져 하던 종정도 노래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종정도 놀아보세.
몸 단정히 앞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주사위를 굴려보며 세상살이 널리 보세…
사위(肆僞, 방자하고 거짓됨)를 반성하며 하늘도리 깨우치세.
나가려면 덕재(德才)요.
근감(勤堪)이면 제자리요.
연빈(軟貧)이면 쉬어야 하네…
혼자서는 외로우니 둘 이상으로 힘 모으세.
5명까지는 마주하여 겨루고
10명까지는 두 패로 갈라서서 겨루어 보세…
각계각층 사람들아 기회 없다 한탄 마소.
나를 알고 나아가면 태산인들 높을 소냐…
9품부터 올라가서 1품까지 가야 하니
멀기도 하거니와 변화도 무쌍하다.
누가 빨리 오를거나, 누가 나라 지킬 거나,
잘 오른다 자랑마라, 그 뒤로는 은퇴로다.
승진하면 기쁨이요, 강등되면 서러우니
불식자강(不息自强) 자강불식(自强不息), 가다말고 쉬지 마라.
부실(不實)하면 파직(罷職)이요, 불충(不忠)하면 사약(賜藥)이라.
감옥 유배할지라도 회개해야 서용(敍用)한다.
잘 나간다 안일(安逸)하면 횡액(橫厄)이 몰아치니,
사헌(司憲) 사간(司諫) 양사법(兩司法)으로 독려하는 채찍이다…
우리 모두 함께 모여 모름지기 애국하세
다섯 모난 윷 끝으로 1품까지 지냈으니,
귀거래사 읊으면서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온 몸으로 덕을 쌓고 슬기롭게 살아가세.
이 노래는 마치 이순신 자신의 삶의 궤적을 읊는 듯하다. 승진해서 좌천했다가 다시 복직하는 과정이나, 기회 없다 한탄 말라는 충고나, 9품부터 시작해서 1품까지 갔다는 얘기는 이순신의 품계 변화를 보는 듯하다. 또한 힘 모아서 종정을 하자는 얘기는 국란 극복을 위해 합심하자는 의지로 보인다. 자강불식(自强不息)하여 쉬지 말고 노력하자는 대목은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낸 듯한데, 불충(不忠)하면 사약(賜藥)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충을 다하였지만, 만일 노량에서 운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끝내 살아서 사약을 받았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이 종정도는 당시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표현한 것으로 공통점이 있지만, 장군에게는 휘하 군사들과 함께 하는 눈높이 효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종정도 게임을 지켜보며 장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