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환자들이 결국 뭔가를 이루어 낸다]
이렇듯 세종 자신의 노력과 각 프로젝트 진행 과정상에 드러나는 리더십은 실로 세종 자신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가 박연의 경우였는데, 그는 세종에게 발탁되어 관습도감 -조선 초기 음악을 가르치던 기관 - 의 제도라는 직책을 맡아 평생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그는 “앉으나 누우나 늘 가슴 사이에 두 손을 포개고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12율) 소리를 내곤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기업에서 얘기하는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박연이 음악 제정 프로젝트에 기울인 정성은 실로 놀라웠고, 이에 대한 집중력은 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기를 십여 년 만에 그는 드디어 ‘조선의 음악’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여기에는 CEO의 10여년 이상 재정적 지원뿐만 아니라, 심적ㆍ정신적 격려가 있어야 했고, 또 박연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집중과 몰두가 없으면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박연 이외에도 각자 자기 고유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간 모든 팀원들에게도 해당되었다.
이처럼 그 시대 인재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편집광’ 같았고, 이와 같은 몰입의 자세는 업무 성과를 극대화 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편집증 환자들이 결국 뭔가를 이루어 냈다! 이 같은 노력은 중국과 대별되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자적인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라]
세종은 고려 때부터 전승되어 온 아악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 세종시대 음악 정책은 세종 8년(1426년)에 이르러 비로소 활력을 얻게 된다. 편경의 재료인 ‘경석(聲石)’ - ‘소리 나는 돌’ - 이 남양에서 발견되고, 율관 제정에 필요한 ‘거서(秬黍),’ 즉, ‘기장’이라는 곡식이 처음으로 해주에서 확인됨에 따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경석의 발견으로 경을 제작하게 되자, 곧이어 기본음 황종음고의 제정이 가능해 졌다. 그전까지는 이미 조율되어 있는 중국의 편종ㆍ편경 등을 수입해다 썼으므로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율관 - 쉽게 말해서 ‘음의 높이를 정하기 위한 기준’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 을 제정할 필요는 없었다.
세종 7년 이후 논의된 율관 제정은 한국음악사 초유의 일인데다가, 율관은 도량형(度量衡)의 기준과 관련이 있었고, 또 ‘중국에서나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당시 박연을 중심으로 진행된 율관 제작 시험은 실로 대단히 관심을 모으는 것이었다.
[음악 분야에서 독자적인 표준을 만들다]
이와 같은 시도는 당시 음악에 있어 중국의 표준을 따르지 아니하고, 우리의 독자적인 표준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야심찬 일이었다. 무릇, 어느 분야에서건 ‘표준’을 만들지 못하고는 독립성을 갖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에 따른 결과는 ‘종속’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사실 지금 우리의 음악은 서양음악에 종속되어 있지 않는가! 세종은 음악 분야에서 바로 이러한 중국으로부터의 종속관계를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중국에서 조율해 놓은 악기를 수입해 다가 쓰는 실정이었으니, 이러한 ‘표준화’의 노력은 국가적으로 실로 대단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악기를 예로들자면, 고려 예종 때 북송에서 대규모로 아악기를 수입한 이래 세종 전까지 악기는 언제나 그 수급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악기의 국내 생산은 아예 엄두도 못 냈고, 중국으로부터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팔음을 다 갖추어야 하는 아악 중 한가지라도 빠지면 음이 제대로 맞을 수가 없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악기가 편경과 편종이었는데 그 재료가 되는 돌(경석)이 국내에서 발견되었으니 율관 제정 및 악기 제작 사업에 활력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규모 악기 제작 사업을 통해 악기 제작에 대한 기술과 지식이 축적되면서 세종 이후에는 더 이상 악기가 수입되지 않아 연주를 못하는 일은 없어지게 된다. 가히 음악 분야에서 확고한 인프라를 갖추게 된 셈이었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황종율관을 제정한 일을 두고 명종 때에 이르러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만세토록 전할 정악(正樂)을 일으키게 한 것’으로 평가할 정도였으니, 그 의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니 음악분야에서 ‘우리 표준의 마련’은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시대에는 이러한 표준화에 대한 요구가 다방면 걸쳐 광범위하게 요구되었고, 작업의 성과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한 글’이라는 당초의 목적뿐만 아니라, 한자음의 표준을 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또 표준 조세안인 공법(貢法) - 지금의 세법 - 제정 등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런 ‘표준’ 의 제정 하에 세종은 국가 경영을 원할히 추진해 갔다. 말하자면 오늘날 기업들이 정관을 마련하고, 사규와 지침과 비전을 세우고 사업을 해나가듯, 세종은 신생 조선의 국가 CEO가 되면서 이런 작업을 평생 동안 해 나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세종은 경영의 최전선에 섰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전체 백성을 끌고 나가는 국가 CEO라는 사실 앞에서 스스로를 다그쳤을 것이다. ‘이대로 머물면 안돼.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라고 말이다. 그것이 세종이 국가 경영에 임해 취한 태도였다.
[세종으로부터 배우는 경영 정신]
* 무엇인가 커다란 대역사(大役事)는 CEO의 확고한 경영 마인드와 강한 의지가 있을 때 추진 가능하다.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프라 구축에 관한 것이다.
* 문제와 해결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장기적인 정책 과제와 시급한 민생 문제는 항시 동반되는 이슈이다. 선별력과 통일성을 갖춰서 이를 밀고 나가라. 그것이 해결에의 열쇠이다.
* CEO 자신의 정신력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성실성은 끈기 있는 과제 수행의 원천이 된다. 결과를 보고 싶다면, 결국엔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 원칙과 표준을 설정하라. 표준(standard)은 반드시 경영에의 토대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한 연구와 끈질긴 노력이 쌓여야 한다. 어느 분야에서건 ‘표준’을 만들지 못하고는 독립성을 갖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 예나 지금이나 뭔가를 얻어 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편집광적이다. 집중과 몰두를 능가하는 ‘힘’이란 없다. 이와 더불어 CEO의 재정적 지원과 심적ㆍ정신적 격려는 일을 이루어 내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된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