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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제도가 문제일까, 이를 운영하는 리더가 문제일까?

by 전경일 2023. 5. 30.

제도가 문제일까, 이를 운영하는 리더가 문제일까? 임란시기 방호체계와 이순신의 전략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보보자.

 

 15924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적은 이튿날인 1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15일 동래부를 함락시킨다. 53일에는 서울을, 28일에는 임진강을 건너 6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부산을 치기 시작해 개전 20일 만에 서울이 무참히 무너지고, 2개월 만에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다. 일일 평균 26km의 놀라운 속도로 적이 북상한 셈이니 특별한 저항 없이 통과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란 초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다 할 방어 없이 밀리게 된 것일까? 임란 전 전쟁 발발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이견과 혼란은 있었으나, 나름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891월 조정에서는 불차탁용으로 이순신을 비롯해 무신들을 천거하기도 했으니 난의 낌새를 못 챘을 리 없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국방 시스템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임란에 임한 당시 우리 수군의 편성과 조직적 역량은 어떠했을까? 혹시 방어 시스템상의 문제점은 없었을까?

 

임란 당시 전라좌수군은 전라좌수사-우후-사도첨사-만호의 지휘체계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순신이 맡은 전라좌수영의 관할지역은 해남반도 남단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의 전라도 해안이었다.

임란 당시 조선의 수군 조직을 살펴보면, 해안지역은 수사의 관할권 하에 들어가 있었고, 육지의 수령인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도 수사가 관할하게 되어 있다. 육지의 행정구역과 수군의 행정구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전투가 발발하면 상호 유기적인 협조 하에 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각 관의 부사, 군수, 현감과 각 진포의 첨사, 만호 등은 평상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다가도 유사시에 전라좌수사의 명령이 떨어지면 각 관, 진포의 선소(船所)에 보유한 전선과 필요 인원을 이끌고 나가 관할 해역을 방위했다. 이들은 전라좌수영에 집결해 좌수사의 지시를 받게 된다. 임란 초 전라좌도는 5(본영,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5(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유한 배도 판옥선, 하우선, 귀선(거북선)이 각각 18, 18, 2척과 12, 12, 1척으로 전체 30, 30, 3척 등 총 63척이었다.

 

장점이 단점이 되는 군사동원 체계

임란 전 지방군의 편성 방법은 전국 행정 단위인 읍()을 동시에 군사단위인 진()으로 편성한 진관 체계였다. 따라서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관 역할도 맡게 했다.

이런 진관 체계에는 장점도 있다. 적이 쳐들어오면 우선 수군이 막고, 수군이 뚫리면 1차 방어선으로 진관이 격퇴하고, 진관이 무너지면 다음 진관이 적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며 인근 진관과 중앙으로부터 후원군이 도착해 방어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해당 지역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자체적으로 방위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방비책이었다. 연안에 빈번히 출현하던 왜구를 해당 지역이 자체적으로 책임지고 격퇴하도록 되어 있는 자기 책임제였다.

 

임란 시 조선수군의 방위체계는 자체 관할구역을 방어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방비책이었다. 이순신의 경상도 출전이 지연된 것은 매뉴얼에 발목 잡힌 군사운영체제가 크게 한 몫 했다. 오늘날 기업이 위기에 직면해 어떤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지 임란 시 조선수군의 방위체계는 잘 보여준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진관 체계다보니 자기 책임 관할구역을 벗어나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구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하려면 조정의 공식적인 명령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 왜구 침략을 막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대규모 전쟁 사태에는 맞지 않았다. 전쟁 초기 이순신이 경상도로 병력을 이동시키지 못한 것은 이 같은 진관 체계가 크게 한 몫 한다. 일테면 매뉴얼에 발목 잡혀 초기 왜구 격퇴 시기를 놓쳐 버린 셈이다.

 

이순신이 모든 함대를 이끌고 첫 출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출전명령서가 도착한 1592427일 이후 3일이 지난 30일 새벽이었다. 이때 새벽 출정을 한 것은 하루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 시간 사용의 효율성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장군은 이때서야 판옥선 24, 협선 15척에 전선으로 위장한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저 어둠의 바다로 나간다.

 

매뉴얼에 발목 잡힌 군사운용 체계

임란 전 장군은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과 진관 체계라는 방위 시스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소규모 왜선 침입과 약탈에 대한 방어차원의 대응만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자 적의 대대적 공격에 모든 전선을 집중 운용하는 전략적 유연성과 민첩성을 보인다. 장군의 동적 전환 능력이 여기에 있다.

 

진관체계 하에서 해상에 근무하는 수군들은 1차 방어를 한다. 만약 해상 방어가 무너져 적이 상륙하게 되면 그때에는 육군이 적을 맞아 싸운다. 단계적 대응 전략인 이런 진관 체계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매너리즘의 폐해를 고스란히 내재하고 있었다. 수군의 육군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자 심지어 중종 무렵에는 왜는 수전이 장기이고 조선은 기병이 장기이니 수군제를 버리고 육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가 제기된다. 이른바 방왜육전론이 이것이다.

 

그러다 삼포왜변 직후, 조정에서는 약화되고 분산된 수군 역량을 보완하고자 자전자수의 방어체계에서 인근 2개 포소가 연합하여 방어하는 체제로 전환한다. 비어방략(備禦方略)’ 체계로 전환한 것이다. 이때부터 연합방위체제는 전라도로 확대. 실시되는데, 이렇게 변화된 방위 체계를 제승방략 분군법이라고 부른다. 제승방략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방어지에 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배정된 방어지로 집결하고, 전투가 벌어지면 정규병은 물론 비군사층까지 동원할 수 있어 군사 운용 면에서는 장점이 있었다. 즉 전쟁이 터지면 후방군이 일선으로 투입되어 혼성부대를 이루어 싸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전시에 제승방략이 발동되면 순변사(巡邊使) 또는 도순변사(都巡邊使)는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군대를 모아서 지휘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 올 때까지는 지휘관이 없는 부대였다는 점이다. 중앙의 지휘관은 내려오며 화약병기 등을 가져 오는 등 화력 보강 면에서는 장점이 있었으나, 문제는 내려오는데 시간이 걸렸고, 지형과 군사훈련 정도 등 현지사정에 밝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병력의 장단점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또한 제1방어선에 전력을 집중해 1선이 허물어지면 2선인 후방이 거칠 것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맹점이 있었다. 임란이 발발하고 나서 처음부터 절망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은 1선이 무너지면 받쳐 줄 2선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일테면 백업 체계가 미약했던 것이다. 제승방략 체계에서 연합부대의 구성은 한반도의 북방지역에서는 자체 도()만으로도 가능했지만, 남방지역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야만 했다. 경상, 전라 일대가 왜적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제승방략 체계 자체의 문제점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군비(軍備)가 허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예견하고 진관체제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그러나 제승방략이 이미 시행된 지 오래여서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로 임란 당시까지는 제승방략과 진관 체계가 혼용되어 쓰였다. 이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은 위기관리 대처 방법이자, 국방 시스템상의 문제였다.

 

기업은 매출이든, 기존 사업의 수성과 신규시장 진출이든 백업 체제를 갖춘 경영을 해야만 한다. 허리가 든든하지 못하면 한번 무너진 시장 내 지위는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다.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 경영을 염두에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영의 안정성을 높이려면 대안 경영을 해야만 한다. 대안이 없을 때에는 끝도 한도 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어 있다.

 

문제점도 있었지만, 제승방략 체계는 뒤집어 보면 지휘체계에서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수사가 연해안 관하의 수군을 직접 관장하게 됨으로써 종래 이원적 지휘체계에서 단일지휘체계로 바뀐 점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소속 5관을 직접 관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수사의 지휘 아래 종래의 소형 병선은 대형 전선인 판옥선으로 전환되어 조선수군은 왜 수군보다 전선(戰船) 면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제도적 결함은 있었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밑받침을 십분 살려 지휘자가 뚫고 나갔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유연한 대응력은 임란 전체를 승리로 이끈 배경이 된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