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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문익점: 더 씨드(The Seed)

혁신을 가져온 한 알의 씨앗

by 전경일 2013. 3. 4.

혁신의 탄생

 

1364년(공민왕 13) 10월, 북쪽에서 몰아치는 국경의 칼바람을 등에 지고 한 사나이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초겨울 매서운 바람은 몸을 날릴 듯 거셌지만, 그의 가슴에는 희망의 열기가 뜨겁게 솟구쳤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춘 그는 품속의 작고 특별한 물건을 더듬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옆에서 따라 걷던 시종 김룡이는 맵짠 추위에 갈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사나이는 이미 지나온 만주 들녘과 앞으로 가야 할 개경 쪽을 차례로 굽어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잦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굶주리며 추위에 얼어 죽어가던 길가의 백성들! 한겨울에도 그들이 걸친 거라곤 엉성한 베옷과 갈옷, 도롱이가 전부였다. 처참한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며 감았다 뜬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돌이켜보건대, 홍건적의 난이 강토를 휩쓸고, 그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오갈 데 없이 떨며 사행 길의 그를 배웅해주던 때가 생각났다. 원나라 황제가 불러 덕흥군에게 의부할 것을 종용하던 때도 떠올랐다. 가짜 이름을 하고 나타난 덕흥군이 그를 찾아와 심중을 떠보던 장면도 떠올랐다. 의부해서 목숨을 구하자는 의견과 의부하면 고려로 돌아가자마자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의견으로 갈리며 생과 사의 선택을 해야만 했던 시간도 떠올랐다.

 

모든 일이 꿈만 같았고, 그래서 먼 옛날이야기 같기만 했다. 황제가 내린 위서(僞書, 거짓 문서)와 조첩(詔帖, 명령문서), 유서(諭書, 부임 명령서) 수십 장을 불태울 때, 그는 이미 목숨을 내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충심을 알아준 듯, 그는 끝내 살아서 고국 땅에 다시 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황제는 그를 예부시랑어사대부(禮部侍郞御使大夫)에 봉했으나, 정중히 사임을 청하고 귀국길에 오르겠다고 아뢴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경에 도착하면 그는 주상(主上)께서 직접 내리신 중현대부예문관제학겸지제교(中顯大夫禮文館提學兼知製敎)의 벼슬을 제수 받을이었다. 충성의 대가로 받을 상이지만 받을 수 없었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집안의 권세를 드높이는 일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유혹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면 달리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그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그는 고려를 떠날 때의 자신이 아니었다.

 

오랜 타국 생활에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뜨거운 결심을 품고 고향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가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위해 매진해야만 한다. 그게 내가 살아 돌아온 이유이자, 평생의 사명이다.’ 이렇게 그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감은 눈을 뜨자 김룡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리, 해가 지려합니다요.”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김룡이가 앞서며 길을 재촉했다. 발걸음을 떼기 전, 국경 너머의 압록 강변을 다시 한 번 굽어보았다. 막 석양이 지려하고 있었다. 그 석양은 원과 고려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했으나, 그에게는 다시 떠오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가야만 한다. 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수많은 계획이 머릿속에서 샘처럼 가득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 발 한 발 옮겨놓으며 바야흐로 조국 고려에 혁명적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기에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하리라. 목숨을 다해 살려내야 하리라.’ 이런 생각들로 고국으로 돌아오는 그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문익점! 우리 역사상 최대의 산업혁신가인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산업혁신가, 문익점

 

문익점은 고려 말엽인 133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하급관리 출신으로 낙향한 아버지 충정공 문숙선(文淑宣)과 어머니 함안 조씨(咸安趙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초휘(初諱)는 익첨(益瞻)이며,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으로 불린다.

 

8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12살 때 대유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다. 이 시기에 이곡의 아들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평생에 걸친 친구가 된다. 그리고 16살 때는 주세후(周世候)의 딸과 혼례를 치른다. 그러나 주씨 부인이 두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자, 진주(晉州) 진양 정씨(晉陽鄭氏) 정천익(鄭天益)의 딸과 재혼한다.

 

20살 때인 1350년에는 성균관 경덕재(經德齋)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며, 3년 뒤인 23살 때에는 원(元)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에서 주관하는 향시(鄕試)에 목은 이색과 함께 초시에 급제한다. 31살 때(1361년, 공민왕 10)는 포은 정몽주와 함께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33명 중 7등[병과(丙科) 제4인]의 우수한 성적이었다. 이 합격자들의 면면은 앞으로 그 시대를 이끌어나갈 대인재들이다. 정몽주[을과(乙科) 제1인], 박(을과 제2인), 이존오[동진사(同進士) 제8인] 등이 합격명부에 그 이름을 올린다.

 

과거 급제에 따라 문익점은 지금의 부군수급에 해당하는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 정8품)으로 임명되어 부임한다. 얼마 후 유교 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순유박사(淳諭博士, 종7품)로 자리를 옮겼다가, 2년 뒤(1363년, 공민왕 12)에는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좌정언(정7품)으로 발탁, 승진된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출세 길을 달린 셈이다. 문익점이 죽은 뒤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거(사망) 기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이 졸(卒)하였다. 익점은 진주 강성현(江城縣) 사람으로 아버지 숙선(淑宣)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박사로서 좌정언에 승진되어 계품사(計稟使) 좌시중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에 갔다. …… 홍무(洪武) 을묘년(乙卯年)에 ……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대부에 이르렀다가 졸하니 나이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 …… 참지의정사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강성군(參知議政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을 증(贈)하였다.

 

문익점의 인물됨을 알기 위한 것으로 그가 맡았던 관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문익점이 역임한 관직은 모두 청직(淸職)에 속한 것이었다. 이 점으로 미뤄볼 때 그는 학문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몸가짐도 반듯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의 목화시배유지에 모셔진 삼우당 문익점의 영정

 

 문익점 미스터리 1

문익점 집안에 내려오는 『가전(家傳)』에 따르면, 문익점은 1331년[충혜왕 원년] 2월 8일에 태어나 1400년(조선 정종 2, 경진) 2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전』은 문씨 집안에서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으로 문익점의 생몰 시기를 월일까지 정확히 기록한 최초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