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직한 대통령을 왜 지키지 못했나
6.3대선 무너진 역사 다시 세우는 시간

2009년 5월 23일의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가눌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고, 피가 솟구쳐 올랐다. 깊은 추도와 묵상을 했고, 이어 조사(弔詞)를 썼다.
16년 지난 지금도 생각해 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인가?
강산이 두 번 가까울 만큼 변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도자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이제나, 또 우리 역사를 통털어, 지도자란 민인(民人)을 뜨겁게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 높이의 삶 그 아래로 내려가 민인을 뜨겁게 품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옛말에도 대천이물(代天以物)이라 하여 지도자란 민(民)인 하늘(天)을 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도자가 그래야 하듯 국민 또한 지도자를 아낌없이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랑받는 지도자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통절한 역사가 16년 전에 벌어졌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하면 지금도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가슴 여민다. 다른 한편,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오른다. 우리 역사상 그토록 서민적이고 민주적인 대통령을 본 적이 있는가?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대통령을 가까이 한 적이 있는가? 마음 씀에 있어 그토록 상대를 배려한 대통령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그런데도 그런 대통령을 왜 지켜주지 못했는가? 왜 그 잘난 자들의 허위에 맞서 분노하고 싸우지 않았던가? 생각할수록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지도자를 추모하는 국민의 일원으로서 세월이 갈수록 연민의 정이 더해진다. 너무나 안쓰럽고 울컥해 목이 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 놓아 울고 싶어진다.
보라,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역사는 이미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있을 텐데. 반역의 세월이, 퇴행의 역사가 짙게 어둠을 드리우고 있는데….
16년 전 썼던 조사에 인용한 다산 정약용의 <솔피 노래(海狼行)>를 다시 읽는다. 물고기의 왕 고래가 솔피 무리의 공격에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시다. 1800년 정조대왕의 갑작스럽고, 의문스런 죽음을 에둘러 묘사하며 탄식한다.
<솔피 노래(海狼行)>
솔피란 놈, 이리 몸통에 수달 가죽
가는 곳마다 열 마리 백 마리 무리 지어 다니는데
물속 날쌔기가 나는 듯 빠르기에
갑자기 덮쳐오면 고기들 알지 못해.
큰 고래 한입에 천석 고기 삼키니
한번 지나가면 고기 자취 하나 없어
솔피 먹이 없어지자 큰 고래 원망하여
큰 고래 죽이려고 온갖 꾀를 짜내었네.
한 떼는 앞쪽에 들이대고 한 떼는 뒤를 에워싸고
한 떼는 왼편 노리고 한 떼는 오른편 공격하고
한 떼는 배를 올려치고 한 떼는 등에 올라탔네.
상하 사방 일제히 고함지르며
살가죽 찢고 깨무니 얼마나 잔혹한가.
고래 우뢰처럼 울부짖으며 물을 내뿜어
바다 물결 들끓고 푸른 하늘 무지개 일더니
무지개 사라지고 파도 차츰 가라앉아
아아! 슬프도다 고래 죽고야 말았구나.
혼자서는 무리의 힘 당해낼 수 없어라
약삭빠른 조무래기 드디어 큰 짐 해치웠네.
너희들 피투성이 싸움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나
본뜻은 기껏해야 먹이싸움 아니더냐.
큰 바다 끝없이 넓기만 하여
지느러미 날리고 꼬리 흔들며
서로 좋게 살 수 있으련만
너희들은 어찌 그리 못하느냐.
피투성이 싸움에서 고래의 죽음은 다산에겐 노론 벽파가 정조를 사정없이 물어뜯던 모습으로 비쳤으리라. 완성되지 못한 개혁의 종착점이 고래의 죽음으로 상징된 것이다.
어떤가? 민주주의가 압살되는 형국이나, 노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세력을 고발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의 죽음을 통한 항거와 그다운 명백함의 의사 표현을 구경거리 삼아온 우리의 졸렬한 자화상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오늘 불현듯, 다산의 글을 다시 떠올리며, 지금 우리는 민족사의 어느 파고를 헤쳐 나가고 있는지 묻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역사에서 정의로움은 패배당하고 마는가? 진실이 승리하는 역사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숱한 상념이 고개를 수그릴 줄 모른다.
뿌리 깊은 사대와 작은 기득권의 끊임없는 강화가 민족사를 어지럽힌 주범이라면, 이 처연한 슬픔은 행동으로 넘어서야 하리. 그것이 죽음을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기에. 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 한 대목을 살펴본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주변에 미안해하고, 삶과 죽음이 ‘한 조각’이라는 망자의 처연함 뒤엔 문득, 광주 망월동을 외로이 지키고 선 무수한 혼령들의 작은 빗돌처럼 그의 ‘오래된 생각’이 비친다.
노 대통령을 공격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그 ‘솔피 무리’는 16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것이 지난 12월 3일 국민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에 벌어진 일대 폭거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우리는 똑같은 질곡의 역사를 16년 지난 지금 이렇듯 또다시 반복하는가? 또 어떻게 국민들은 공격받은 민주주의를 다시 들쳐업고 분연히 일어나는가? 자연히 숙연해진다.
이제 반복되는 반역의 역사를 끝장내야 한다. 6월 3일. 무거운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아니 윤 정부가 들어서고부터 무너져온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한 겨울의 어둠을 뚫고 다시 봄이 왔듯, 이제 우리는 퇴행의 역사를 밀어내고 새로운 각오로 내일을 다짐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만세! 라고 다시 외쳐 불러야 한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17